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의 책꽂이에서 카톨릭 월간지인 '야곱의 우물'을 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기사가 있길래요.
이향만 님이 쓰신 '장자 읽기' 라는 연재 기획입니다. 글이 명료하고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06년 9월부터 연재를 하셨는데, 나머지 책은 아직 보질 못해서 발췌해서 올립니다.
꽃샘 추위치곤 눈까지 날리고, 날이 춥습니다. 물러가는 추위에 건강 조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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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者莊周夢爲胡蝶. 木羽木羽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然覺, 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爲胡蝶,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제물론’ 마지막에 나오는 나비 꿈 이야기다. 장자는 나비 꿈 이야기를 통하여 지금까지 자신의 내적인 변모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다. 인식과 존재 양식의 변화를 통하여 자기를 발견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장자는 나비 꿈 이야기의 은유를 통하여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 이 나비 꿈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미적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꿈과 현실 경계를 변화를 통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열어주었다. 꿈꾸는 장주와 꿈꾸는 나비 사이에는 극적인 대비가 암시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모순되고 제한된 의식에서 나비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대비다. 기괴함·장애·미치광이의 모습은 이제 꿈을 통하여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된다. 꿈에서 깨어난 장주에게 더 이상 혼란스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변모로 그는 사물의 참된 변화를 인식하게 된다.

나비가 주는 은유는 연약함과 아름다움과 변신과 자유다. 연약함은 섬세하고 다칠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늘 상존한다. 갑자기 바람이나 비가 온다면 덧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비한테서는 그러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 여유롭고 한적하게 너울거린다. 헤르만 헤세의 「나비」를 읽지 않아도 우리는 나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다. 색감과 무늬는 우리를 황홀케 한다. 더욱이 나비의 짝은 꽃들이다. 나비가 내려앉음으로 너울거리는 꽃잎이 더해진 꽃들은 생동하는 꽃으로 다시 탄생한다. 그가 앉는 곳은 모두 아름답게 변모한다. 그의 몸짓은 정지된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술 지팡이다.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왔는가. 나비는 추하고 괴물 같은 유충과 번데기에서 변신하였다. 나비는 열등함에서 우월로, 정지된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기는 것에서 나는 것으로, 내부에서 초월로 일어난다. 추함은 아름다움을 담지하고, 정지된 것은 움직임을 예정하고, 기는 것은 날기 위한 수고였다. 자신의 껍데기를 모두 벗어버리자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전혀 예견할 수 없었던 모습이 나타났다. 아름다움과 자유는 두 개념이 아니다. 나비는 자유를 얻기 위한 긴 여정에 비해 남아 있는 생이 짧다고 하여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진정 자유롭고 고귀하다.

-----> 아래 부분은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을까 싶네요.

성경에서 꿈은 하느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창세 41,25; 다니 2,18).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위하여 준비하고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룩한 계시 방식이다. 꿈은 은유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누군가 그 은유를 해석해 내야 한다. 야곱과 요셉과 다니엘의 꿈 해석은 바로 우리가 미몽에서 깨어나 거룩한 변화를 대비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일어난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성변화의 의미를 알고 있다. 거룩한 변모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이다. 하느님에서 연약한 아기로, 사람에서 먹히는 빵으로 하강의 성변화다. 이 거룩한 변모는 불완전한 우리가 거룩한 존재로 상승하기 위하여 약속되었다. 이 여정에서 주님은 우리가 삶으로 해석해야 할 말씀이다. 그분의 삶은 경계를 넘어서야 풀리는 꿈의 은유다. 무지와 두려움으로 가려진 우리 가운데서 내재된 나의 참모습을 불러내시는 은유다.

주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 나타난 비둘기 모습의 성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이 자유와 평화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서 우리는 비둘기가 희망의 전령으로 나타남을 보았다(창세 8,8). 비둘기는 번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봉헌된다(창세 15,9; 레위 1,14). 또한 아가에서 비둘기는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상징한다. “바위 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아가 2,14). 비둘기 형상이 나비와 비슷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오면 우리는 새 아담이 된다.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내 안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흘러 새로워지고 아름다워진다. 우리는 더 이상 죄에 굴복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는 복된 계기를 갖게 된다. 우리 삶의 경계가 열려 죽음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문이 되어준다. 성령은 비둘기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문다. 우리의 시선을 더 높은 곳을 향하게 하고 우리를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게 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 변모를 체험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영원한 꿈의 세계로 인도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사도 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