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0년 11월9일 김태익 논설위원  "독고노인과 한자교육"-

 

우리 사회는 이제 학교 교육에서 한자(漢字)를 얼마나 더 방치할 것이냐 근본적으로 되돌아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을 요 근래 접한 것만 꼽아봐도 이렇다.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 아들이 국회 4급 비서관에 채용돼 특혜 논란이 인 적이 있다. 그 의원 측은 "아들은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재원"이기 때문에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재원(才媛)'을 국어사전에서 다시 찾아보았다. '재주 있는 젊은 여자'라는 뜻이다.

중앙박물관서 열리고 있는 고려 불화(佛畵) 전시회에 대한 신문 칼럼에 어느 네티즌이 "오호, 통제라!" 하는 댓글을 남겼다. 이 아름다운 그림들이 90% 이상 해외에 흩어져 있는 현실이 원통하다는 얘기다. "오호, 통재(痛哉)라"를 잘못 쓴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을 두드려 봤더니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오호, 통제라'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그 중엔 정당의 정책위의장이란 분도 있었다.

수도권에 있는 어느 이발소 간판 옆에는 '독고노인 무료'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돌보는 이 없이 혼자 사는 노인은 돈 안 받고 이발해 드리겠다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아예 쉬운 우리말로 풀어쓰거나 '독거노인(獨居老人)'이라고 제대로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동안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젊은 세대가 부모 이름, 나라 이름도 한자로 못 쓴다든가 기초적인 한자도 읽지 못한다고 걱정해 왔다. 언론에서 한자를 잘 안 쓰니까 뜻이 금방 이해되지 않는다는 불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과 불만이 사치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한글세대가 다수를 차지하고 국민의 한자 지식이 얕아지면서 우리 말 중 70%를 차지하는 한자 어휘의 연원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잦아졌다. 그 결과 그 단어의 원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때나 사용하는가 하면,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지 모르고 들리는 대로 적다 보니 잘못 적기 일쑤다. 한자를 몰라 불편한 차원을 넘어 한자를 모름으로써 우리 언어생활의 약속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개관한 안중근기념관의 팸플릿에 기념관 앞 조각 작품 사진과 함께 '최말린 작 2010'이란 설명이 붙었다. 우리나라에 최말린이라는 조각가는 없다. 알고 봤더니 서울대 명예교수인 조각가 최만린(崔滿麟)씨 이름 한자를 모르는 누군가가 들은 대로 쓰다 보니 이런 결례를 한 것이다.

40년 전의 한글전용 정책은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문자생활을 넓혔다. 문제는 한글전용을 하려면 한자교육을 폐지해야 한다는 착각이었다. 그 결과 공교육에서 한자교육은 설 자리를 잃었고 우리 사회는 언어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한자에 대한 문맹(文盲)을 수십년 양산해 왔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는 초등학교 4학년 3명 중 2명은 책을 읽고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 못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한자에 약한 부모 밑에서 자라고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배우는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이다. 연초 교육과정평가원이 학부모 89.1% 교사 77.3%가 초등학교 한자교육에 찬성한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교육부는 요지부동이다.

뜻도 모르고 잘못 쓴 한글은 오히려 한글을 학대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한자를 가르치는 것이 한글을 포함한 우리 말의 발전과 풍요로운 언어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쪽으로 생각의 전환이 이뤄질 때가 됐다.